보도

[‘GO 500’ 김병지] <5편> 영욕의 태극마크' 대표팀에 얽힌 회한

관리자 | 2009-10-16VIEW 1905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역시 대표팀에 대한 기억이다. 태극마크는 내 선수 생활의 영욕이 그대로 투사되는 상징이나 다름없다. 태극마크와 처음 연을 맺은 것은 95년이었다. 94년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98 프랑스월드컵을 준비하는 첫 단계에서 대표팀에 발탁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구 선수를 하면서 꿈꿔왔던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대표팀을 지휘하셨던 분은 박종환 감독님. 선수 관리에 엄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때문에 나의 튀는 언행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을까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님은 실력이 뒷받침되고 선수로서의 본분만 망각하지 않는다면' 선수 각자가 개성을 드러내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시대 분위기도 내가 좀더 과감해질 수 있도록 장려(?)했다. 이기타' 캄포스' 칠라베르트 등 ‘공격하는 골키퍼’들이 득세하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형의 골키퍼' 김병지의 등장은 그런 면에서 신선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대표 선수가 된 이후 나는 많은 영광을 맛봤다. 하지만 오늘은 영광의 순간보다 좌절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쁨에 취했던 순간보다 절망을 극복해낸 과정을 공유하는 게 훨씬 의미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8 월드컵 네덜란드전' ‘세계의 벽 앞에서 넘어졌다’ 대표 시절의 회한에서 첫 손에 꼽히는 기억이 있다.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2차전이었던 네덜란드전이다. 한국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0-5로 패했던 참담한 경기였다. 나뿐 아니라 그 경기에서 뛰었던 우리 선수들 모두에겐 악몽 같은 기억이다. 말 그대로 세계의 벽은 높았다. 네덜란드의 경기력' 선수 개인의 수준도 높았지만 관중들의 응원 열기에 먼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오렌지색 물결. 어쩌면 2002년 대한민국의 붉은악마가 보였던 열기 이상이었던 것 같다. 원정지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문화적 충격이었기에 그 강도가 더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팀의 혼을 빼놓는 상대의 공격력에도 혀를 내둘렀다. 코쿠' 베르캄프' 드부어' 오베르마스' 반후이동크… 한 골씩 허용할 때마다 절망을 느꼈다. 경기 후에 많은 이들이 ‘5골이나 먹었어도 한국에서 가장 잘 한 선수는 김병지였다’며 위로했지만' 그 자체가 세계 수준과 우리 실력의 격차를 드러내는 말일 뿐이었다. 경기 후에 밀려오는 상실감도 극복하기 어려웠다. 16강 진출을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실 네덜란드에 0-7' 0-8로 패했어도 1차전이었던 멕시코전(1-3패)에서 승리를 거뒀더라면 우리는 16강행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멕시코전을 좀더 지혜롭게 넘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3차전이었던 벨기에전에서는 투혼을 불살라 1-1 무승부를 거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겪었던 허무함들을 치유하기 쉽지 않았다. 세계의 벽을 뛰어넘으려다 넘어지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다. 칼스버그컵에서의 드리블' 고난의 시작 드디어 ‘문제의 사건’을 말해야 할 때가 됐다. 2001년 1월 홍콩칼스버그컵 2차전. 파라과이전에 선발 출장했던 나는 경기 중 공을 몰고 나가다 상대 선수에게 빼앗겨 위험 상황을 맞았다. 굳이 해명하자면 이렇다. 빨리 킥을 하면 우리의 역습 상황으로 연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던져놓고 차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끌고 나갔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을 처음 맡았던 히딩크 감독에게는 너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고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고백한다. 사실 2002년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히딩크 감독과 적잖은 신경전을 펼쳤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히딩크 감독은 심리전의 대가다. 선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스타 플레이어나 고참 선수를 공개적으로 치기도 한다. 사견이지만' 한국 대표팀을 맡았던 초기에 ‘본보기’로 제대로 걸렸던 이가 나였던 것 같다. 이후 대표팀을 몇 차례 들락거리는 과정이 반복됐다. 그 즈음 나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달고 있었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대표팀 훈련에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팀에 재발탁됐을 때는 허리 부상이 겹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쉴라치면' 히딩크 감독은 또 ‘태업’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차기 대표팀을 소집할 때 내 이름을 빼놓았다. 히딩크 감독과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지리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속팀에서 나는 펄펄 날았다. 평균실점 0점대를 유지하면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리그에서는 ‘김병지의 저주’가 절정에 달했던 때이기도 했다. 2001년 FA컵 4강전에서는 울산을 상대로 페널티킥 2개를 모두 막아내는 선방 활약을 펼치며 팀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결국 기량과 방어율에서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나를 대표팀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히딩크 감독도 여론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걸까. 나에 대해 재평가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시 대표팀의 호출을 받게 됐다. 마지막 소집을 위해 (홍)명보 형과 함께 택시를 타고 파주NFC에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명보 형은 내게 “이번에 들어가면 월드컵까지 같이 가자. 월드컵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당부했다. 나 역시 대의를 위해 자존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공격성향' 후회한 적 없다 돌아보면 파라과이전에서의 ‘판단 미스’는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내 실력과 기량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만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후 내 플레이스타일에는 변화가 생겼다. 단순히 히딩크 감독의 눈밖에 났던 것 때문은 아니다. 다만 팬들이 이제는 ‘안정감’을 더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공격지향의 플레이로 사랑받던 시대를 지나' 안정감으로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게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됐다는 걸 느낀 것이다. 나는 공격지향의 플레이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걸 강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여러 무기들 가운데' 현 시점에서 팬들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캐치해 보여주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요즘은 안정감있는 플레이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 부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공격적인 성향 탓에 실점 확률이 높았던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오히려 적극적인 플레이를 펼친 덕에 방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나는 매 시즌 0점대 평균실점을 유지했다. 활동 반경이 넓었기 때문에 수비라인 뒤의 또다른 수비수' 스키퍼(스위퍼+골키퍼)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파라과이전에서 실수했던 기억은 아프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한국 최초의 공격하는 골키퍼였고' 골 넣는 골키퍼였으며' 팬들의 환호성을 끌어낸 골키퍼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골키퍼’' ‘꽁지머리’로 팬들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다. 음지에 있던 골키퍼들의 존재감을 새롭게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걸음이 아니었나 싶다. 후배들' 실력으로 나를 제압하라 태극마크를 다시 달게 된 것은 2008년 1월. 2002년 이후 5년 만이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 명예 회복이 된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제 대표팀에 대한 미련은 없다. 혹 대표팀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대표팀에 갈 수 없다는 현실 또한 인정한다. 물론' 그것이 곧 내 기량이 하락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경남에서 주전 골키퍼로 뛰고 있고' 실점 위기를 여러 차례 세이브하면서 승리에 기여하고 있다. 내 실력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은 여전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빨리 지도자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될 때도 있다. 타고난 체격 조건에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후배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6개월만 가르친다면 정말 좋은 골키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재능들이 눈에 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선수들이 숙성되기를 기다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골키퍼 역시 경험이 쌓일수록 좋은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고 무작정 오랫동안 경험만 키우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내 노하우를 전수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아직도 이운재(수원)나 나를 실력으로 제압하는 골키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후배 골키퍼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선배들을 뛰어넘는 실력자들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에 좀더 철저해져야 한다. 경기 출전여부를 떠나 훈련 태도와 멘탈 모두 좀더 진지해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골문을 지키는 주인공은 한 명이다. 경기에 뛰지 않는 이들의 일상은 늘 똑 같은 훈련을 반복하는 것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조연이 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대표팀에 있는 선수들이라면 다양한 실점 상황에서의 대처 방법' 전체 팀원과의 조직력을 유지하는 방법 등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파악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될 때만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다. 김병지를 밀어낼 수 있는 후배 골키퍼의 등장을 기대한다. 구술=김병지/ 정리=배진경 기자 (6편에서는 ‘누가 나를 위기라고 했나- 경남FC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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