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GO 500’ 김병지] <3> ‘김병지의 저주’와 2004년 챔피언결정전

관리자 | 2009-09-25VIEW 1885

::: ‘GO 500’ 김병지 <3편> 포항 시대- ‘김병지의 저주’와 2004년 챔피언결정전::: 2001년 나는 또 한번 프로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9년 동안 몸담았던 울산 현대를 떠나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워낙 갑작스러운 이적이었던 터라 많은 이들이 놀라는 동시에 의아해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울산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을 정도로 대표성이 있는 선수였고' 팀내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내 의지보다는 구단 간 이해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던 이적이었다. 순수하게 내 의지만 반영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울산에 남아 ‘레전드’가 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수의 이적은 일반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배경에서 진행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포항행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해 1월 말' 나는 당시 최고액 트레이드 머니(이적료 5억 5천만원+계약금 3억원+연봉 1억 2천만원)를 기록하며 울산에서 포항으로 이적했다. ’김병지의 저주’ 탄생 2001년을 기점으로 ‘축구 선수’ 김병지의 인생은 새로운 막을 열었다. 이전까지의 9년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근원이자 기본을 마련하는 시간이었다면' 이후의 9년(포항 시절부터 경남에서 뛰고 있는 현재까지)은 실력 향상과 기록 싸움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골키퍼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0점대 실점율을 기록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2001년이었다. 이후 2002년(21출장 27실점)을 제외하면 줄곧 0점대 실점율을 유지해왔다. 2002년 4월부터는 연속 무교체 출장 기록도 늘렸다. 2004년부터 4년 간 리그 경기에서 단 한 번의 교체 없이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는 것에도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돌아보면 끊임없이 나를 단련할 수 있었던 힘은 책임감이었던 것 같다. 이적 후 내게 보내지는 질타의 눈초리들' 혹은 내 실력에 대한 불신의 시선들을 바꿔놓고 싶었다. 유니폼을 바꿔입어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은 경기장에서 실력으로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특히 친정팀인 울산 팬들이 ‘왜 김병지를 보냈을까’라는 아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하고 싶었다. 울산전에서 유독 강한 집중력을 발휘했던 이유다. 내가 이적한 후 포항은 울산을 상대로 10승 2무 5패의 강세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김병지의 저주’라는 것이 탄생했다. 내가 전 소속팀을 상대로 유독 많은 선방 활약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언론에서 붙여준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골키퍼 입장에서 특정 팀의 공격만 잘 막아낸다는 의지를 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김병지의 저주’가 만들어진 것은' 중요한 고비에서 포항이 울산의 발목을 잡았던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2003년 울산의 우승 경쟁을 방해한 것이나 2004년 4강 플레이오프에서 울산의 맹렬한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우리가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던 것 같은 일 말이다. 울산 입장에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무너졌으니 그 충격이 더했으리라. 세대 교체의 변화 속에서 2000년대 들어 포항은 점차적으로 세대 교체를 단행했다. 이전까지 전국구 스타들이 모두 모여있는 화려한 팀이 포항의 이미지였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유소년 시스템을 통해 배출된 선수들을 키우는 팀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보면 스타급 선수 영입이 이뤄진 마지막 세대에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전혀 다른 분위기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하)석주 형' (홍)명보 형' (이)민성이 같은 대표 출신 선수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이 있는가 하면 대표 경험이 전무한 어린 선수들을 리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석주 형' 명보 형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참 소중했다. 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추는 것과 클럽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은 또 달랐다. 형들로부터 새롭게 배울 만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내가 좀더 성숙해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반면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조금 힘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특히 2005년은 새로운 감독(세르지오 파리아스)의 부임과 함께 포항이 본격적으로 물갈이 되는 시기였다. 수비라인에 서는 선수들도 완전히 젊은 선수들로 재편됐다. 제일 뒤에서' 그리고 고참으로서 내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진 시기였다. 혹자는 후배들을 향해 모진 소리를 하는 당시의 내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도 한다. 굳이 변명하자면' 경기장에서만큼은 모든 선수가 프로 근성을 발휘해주길 바라는 선배의 마음에서 나온 질책이었다. 누군들 경기장에서 즐기는 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즐기는 운동과 프로 무대에서의 승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실수로 팀이 패할 위기에 놓여있는데' 즐긴다는 명목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프로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의미다. 선수 개인에게도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팀의 패배보다 자신의 실책에 대한 잔상과 자책감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더 오래 가기 때문이다. 즐긴다는 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과 동료들 사이의 신뢰가 전제될 때 나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쓴 소리를 했다. 물론 그조차 경기장 안에서의 일이었을 뿐 밖에서는 잔소리를 한 적도 없다. 2004년 챔피언결정전의 쓴 맛 포항 시절은 내 축구인생의 희로애락이 집약된 시간이었다. 리그에서나 대표팀에서나 모두 그랬다. 2004년 K-리그 포스트시즌은 그 결정체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울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무실점 선방 활약을 펼치며 팀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도왔다.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수원. 홈에서 치러진 1차전에서 나는 다시 한번 좋은 활약으로 무실점을 지켰다. 양팀 모두 팽팽한 접전을 벌인 끝에 0-0 무승부를 만들었다. 원정으로 치러진 2차전 역시 경기 양상은 비슷했다. 본 경기에서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연장전으로 넘어갔음에도 양팀은 득점 없이 공방만 주고 받았다. 결국 운명의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네 번째 키커였던 이민성(포항)과 김진우(수원)가 각각 실축했고' 다섯 번째 키커로 나선 우르모브(수원)가 킥을 성공시키면서 수원이 4-3의 리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축구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장면' 내가 포항의 마지막 키커로 나서 이운재와 대면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가혹하게도 내 발끝을 떠난 공은 그만 중앙으로 쏠리며 막히고 말았다. 벌써 5년이 지난 과거 일임에도 그 때를 떠올리는 지금의 내 마음은 편치 않다. 입안이 텁텁하고 쓴 맛이 느껴질 정도다. 실수라고 하기엔 팀원 모두가 겪었을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사실 승부차기 키커는 미리 정해진 상황이었다. 2차전을 앞두고 일주일 동안 훈련하면서' 비길 경우를 대비해 키커들이 번갈아 승부차기를 연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을 번복하고 싶다. 당시 팀을 지휘했던 최순호 감독님은 오히려 나를 격려했지만' 한동안 나 때문에 팀이 졌다는 죄책감과 중압감에 눌려있었다. 내 선수 생활 전체를 두고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운' 몇 안되는 순간 중 하나다. 앞서도 말했지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린 선수들에게 실수를 경계하라고 호통쳤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의 실수가 팀의 패배로 직결될 때' 팀은 물론 선수 개인이 겪어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 나름대로 베테랑이라 자부하던 내가 그 정도였으니' 어린 선수들이 겪게 될 심리적 타격은 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구술=김병지/ 정리=배진경 기자 (4편에서는 '서울 시대- 챔피언이 되지 못한 최고의 골키퍼'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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