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 500’ 김병지 <2편> 첫 전성시대' 잊을 수 없는 98 월드컵::: 2002 월드컵 최고의 히트 문구' “꿈은 이루어진다”. 이제는 식상할 법도 하지만 ‘꿈꾸는 자’들을 위한 격문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학창시절부터 지금의 내 모습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았던 시간들을 함축한 말인 것도 같다.
꿈은 이루어진다 여러 차례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축구에 대한 열망만큼은 놓지 않았다. 그래서 꿈은 현실로 바뀌고' 결국 프로라는 무대 위의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92년 프로팀 현대(현 울산)에 입단했다. 갈망하던 무대에 올랐으니 춤이라도 한껏 추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냉정했다. 당시 현대에는 조병득(현 수원 코치)' 최인영(현 전북코치) 같은 대선배들이 있었다. 선배들의 위상 앞에 나를 다스려야 했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배우는 데만 2년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 시간 동안 자제력도 생겼다. 돌이켜 보면 당대 최고의 골키퍼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나 다름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에는 변함이 없다. 배움의 시간을 2년으로 잡고 있던 내 계획은 생각보다 빨리 수정됐다. 93년 사리체프(신의손)를 시작으로 외국인 골키퍼들이 K-리그 골문을 잠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국내 골키퍼들이 그들 못지 않게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서둘러 검증해 보이고 싶었다. 이런 마음은 실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내 이름 앞에는 ‘유일한 토종 골키퍼’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 이 타이틀을 사수하기 위해 연습에 더욱 몰두했다. 내 머릿속에는 축구 생각만 가득했다.
94년 동계훈련 이후 자신감 상승… 브라질서도 영입 제의 마침 팀 상황도 내게 좀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환경이 되었다. 94년 미국월드컵을 앞두고 최인영 선배가 대표팀에 자주 차출되면서 그 공백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94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가진 동계훈련은 내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브라질 전지훈련에서 연습경기마다 필사의 자세로 임하면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당시 현지 클럽 관계자와 언론들이 ‘한 팀의 골키퍼 수준이 저 정도면 대표팀의 실력은 더 대단할 것’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전지훈련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자신감이 상승했다. 이후 브라질에서 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해외진출이 원활하게 이뤄지던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쉬움을 접어야 했다. 아마도 지금처럼 여러 방면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면 나는 더욱 많은 것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남미 진출 1호’ 선수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스타 골키퍼의 탄생… ‘공격하는 골키퍼’의 시대를 열다 94년 브라질 전지훈련 이후 나는 좀더 단단한 선수가 되어있었다. 그해 리그에서 27경기 출장을 기록한 것에 이어 95년에는 입단 이후 최다 출장(35경기)를 기록하면서 팀의 주전으로도 자리를 굳혔다. 무리없이 좋은 결실을 얻으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즈음이었다. 팬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그래서 뒷머리를 기르고 형형색색의 염색으로 튀는 헤어스타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축구계에서 그런 스타일은 자칫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당할 수 있었다. 축구계의 진정한 아이콘이 되고 싶었다. 경기장 안팎에서의 노력은 95년 생애 첫 대표팀 발탁의 기쁨으로 이어졌다. 박종환 감독님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나의 기량은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함께 나날이 발전했다. 그때부터 나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도전하기 시작했다. 골키퍼의 역할을 확장시키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기피하는 포지션인 골키퍼를 양지로 이끌겠다는 각오였다. 적극적으로 경기를 치르면서 ‘공격력을 지닌 골키퍼’의 시대를 열었다. 내게는 100m를 11.6초에 주파하는 빠른발과 민첩성' 순발력이 있었다. 누구라도 시도하고 싶지만 아무나 해낼 수 없었던 공격축구는 이런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했다. 나의 공격축구는 관중을 열광시켰다. 시대적 트렌드에 부합하는 현란한 염색 머리도 팬들의 의식을 바꿔놓는 데 한 몫 했다.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모든 것에 행운까지 따랐다. 그야말로 전성시대였다.
세계의 벽을 실감한 98 월드컵… 英 클럽 입단 제의도 프로 입문 후 정상을 향해 쉼없이 달려왔던 나의 노력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출전이라는 결실을 맺게 했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 월드컵이라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평생 동안 월드컵에 대한 기억은 지울 수 없다. 98년 월드컵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지만'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나는 이렇게 정리하겠다. ‘기대와 아쉬움이 가득했던 힘든 무대’라고.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아시아 예선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며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본선 조별리그에서 1무2패로 탈락했고' 특히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지금도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 중 대표팀의 노란 유니폼을 입고 무릎을 꿇은 내 모습을 볼 때면 참 많이 아프다. 아직 어린 아들 녀석이 “왜 넘어져 있냐”고 물어보는데' 아무리 잘 설명해도 공감하지 못할 감정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벽을 넘다가 넘어졌다”고 답한다. 정말로 축구 강국'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다음에 너도 해볼래?”하고 물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은 꼭 해보겠단다. 아버지로서 바란다. ‘그래' 너는 꼭 그 벽을 넘어섰으면 좋겠구나…’. 월드컵에서 아쉬움이 가득했던 결과와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잉글랜드의 모 클럽에서 적극적으로 영입 제의를 전해온 것이다. 나 역시 더 큰 무대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외 진출에는 여러 장벽이 있었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여건들로 인해 유럽 진출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대신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야만 했다. 나는 그해 축구선수들 중 최고액 연봉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98 K-리그 플레이오프 헤딩골의 감동 그해 늦가을' 나의 소속팀이었던 울산은 K-리그 챔피언결정전 진출권을 놓고 포항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차전 원정 경기에서 2-3으로 패했던 우리팀은 2차전에서 반드시 이겨야하는 상황이었다. 두 팀의 경기는 1' 2차전 내내 K-리그 역대 최고로 손꼽힐 정도의 명승부로 진행되고 있었고' 2차전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2차전에서 울산이 1-0으로 앞서나갔지만 후반 40분 박태하가 동점골을 넣으며 승부를 돌려놓았다. 울산은 비기기만 해도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경기에 대한 몰입도는 최고조로 올라갔다. 후반 45분 미드필드 정면에서 프리킥을 얻으며 마지막 공격 기회를 잡는 순간' 나는 상대팀 골문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기어이 역사를 만들어냈다. 후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는 아내의 말과 ‘극적인 드라마였다’는 TV 중계진의 표현' 그리고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 이 모든 것을 끌어낸 명장면이 탄생했다. 김현석 선배의 프리킥이 문전으로 향하는 순간' 상대 수비진 사이에서 뛰어오른 내 머리가 볼을 건드리며 포항의 골망을 흔든 것이다. K-리그 최고의 빅매치' 나의 헤딩골!!! 글=김병지 (3편에서는 '포항 시대- 김병지의 저주와 2004년 챔피언결정전'이 이어집니다.)